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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에 멜로드라마를 허하라 '아이 캔 스피크'
아픈 역사에 멜로드라마를 허하라 '아이 캔 스피크'
  • 전인수
  • 승인 2017.09.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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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구청에 넣은 할머니가 있다. 8천 건이면 20년 동안 주말 빼고 매일 하루 한 개씩은 넣어야 가능한 수치다. 그래서 옥분(나문희 분)은 바쁘다. 낡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너나없이 모여 서로 들이밀고 비키다 보니 생긴 작은 시장, 그녀는 매일 그곳을 순찰하면서 민원감이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어떤 날은 골목을 가리고 있는 입간판이 문제고 어떤 날은 누군가 아무렇게나 툭 던져 버린 담배꽁초가 문제고 어떤 날은 방범등이 나가서 문제다. 특히 최근에는 낡은 건물의 주인이 재개발을 위해 건물을 의도적으로 부식시키는 통에 드잡이를 했다.

 

수선집 운영에 동네 순찰까지 매일매일이 바쁜 할머니가 목숨 걸고 붙잡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영어다. 할머니는 전근 발령을 받아 명진구청 민원과에 오게 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에게 영어 과외를 부탁한다. 민재는 민원 폭탄을 넣는 옥분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쳐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고 입을 떼는 것도 힘들어하던 옥분은 어느새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간단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발랄한 코믹영화의 장르를 유지하던 영화가 무거운 역사적 이야기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은 정확히 영화의 절반 지점이다. 옥분 할머니가 평생 밝히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픔을 모두가 확인하게 되는 순간 영화는 전혀 다른 지점으로 흘러간다.

 

민재가 옥분에게 영어 수업을 가르치며 갈등을 겪는 중반 시점까지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서는 멜로 플롯의 정서이다. 둘은 사랑의 대상은 아니지만 만남과 오해 그리고 이별을 반복하면서 오해와 감동 사이를 오간다. 멜로의 플롯에서 두 주인공은 항상 마주치지 못하고 이별을 반복한다. 멜로 플롯에서 이별은 최후의 영원한 재회를 위해 마련된 필연적 고통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이후에 가장 극적인 만남을 만들어 내기 위한 복선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후 돌연(?) 위안부 이야기로 변모한다. 옥분이 영어를 공부하고자 했던 진의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옥분의 목표는 위안부 사죄 결의안 채택을 위한 미국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영어로 제대로 발언하는 것이다.

 

 

 

 

 

멜로 플롯의 정서를 따르던 영화는 옥분이 청문회에서 ‘아이 캔 스피크’를 증명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추구 플롯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적 상상력만은 여전히 남는다. 문예이론가 피터 브룩스는 자신의 저서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서 이를 선악의 선명한 구분과 과잉의 감정으로 규정한다. 쉽게 말해 신파다.

 

신파적 드라마는 항상 절대적 선과 악이 나뉘고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거나 목표로 이루는 과정에서 과잉의 정서가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윤리의 보편적 기준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신파의 과장은 주로 감정의 폭발이나 과잉으로 치닫는다. 개연성을 무시한 억지스러운 전개가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분명 신파적이다. 전반부의 멜로의 특성과 후반부의 선악의 대립은 감정의 과잉으로 이끌고 이를 비추는 영화의 장면들도 작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후반부에 민재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는 옥분에게 한국에서 사진을 보내는 장면과 의회로 들어가 ‘하우 아 유’를 외치는 장면이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드라마를 신파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신파적 요소들이 실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둘러싸고 그 주변부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옥분을 제외한 인물들에는 작위적인 요소가 있다. 민재의 원칙주의적 성격은 옥분과의 극적 긴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구청 동료들과 옥분의 시장 동료들도 일부 도구적으로 소모된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옥분의 캐릭터는 신파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캐릭터는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도 핍진성을 부여한다. 신파를 넘어서는 진실이 옥분에게는 있다.

 

중반부, 그녀의 진실이 밝혀질 때 민재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전과 다른 감정으로 옥분을 바라본다. 너무나 윤리적으로 변해버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색함을 느낀 건 나뿐일까. 세상은 타인의 고통에 생각보다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때때로 누가 그랬다더라 하는 가십거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라는 특수성이 이러한 세태적 감각을 지워버린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 숙연한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볼 때 살아 있는 비문을 본다. 어마어마한 상처가 정확한 사실로 새겨진 그들의 몸에는 이미 죽음의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살아 있는 죽음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경외와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특수성은 옥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윤리적 반응들과 민재의 변심 그리고 ‘아이 캔 스피크’ 할 수 있게 되는 순간까지의 일부 작위적 설정들에도 사실적으로 납득이 되어 버린다. 신파를 한 단어로 과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은 과장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반부에 코믹적으로 연출된 멜로 플롯은 관객들을 웃게 하기 위한 소모적 시도가 아니라 옥분의 역사적 사실로 다가가기 위한 거리 확보로 작용한다. 우리 중 어떤 누구도 그 고통에 곧바로 직면할 수는 없다. 그건 사실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 위안부의 처참한 경험을 그대로 목도한다고 그 고통이 적절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는 항상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일상인으로서의 옥분을 조명하는 과정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를 역사적 참사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존재로 그리지 않았다. 옥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영화는 옥분을 통해 역사가 과거에 못 박혀 있는 것이 아닌 현재 우리 주변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껴지도록 한다. 또한 이 캐릭터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능동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멜로 플롯과 신파의 정서는 이러한 캐릭터 구현을 위해 주변부에서 맴을 돌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오히려 이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일상적이고 인간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옥분을 보다 살아있는 캐릭터로, 보다 진정성 있는 인물로 거듭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서가 역사적 사실을 슬며시 빗겨서 작동하면서 끔찍한 과거에 접근하는 한 층의 겹을 만든다. 그리고 이 겹은 관객들에게 보다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진심을 다해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장르적 특성이 이 영화의 윤리가 된다.  

 

아픈 역사를 다룰 때 매체는 윤리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윤리성에 대한 고민 때문에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다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역사는 박제된 채로 남아 있는 교과서의 지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아직 불모지처럼 느껴지는 위안부 문제에도 ‘멜로드라마’는 필요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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