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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소통 그 유한한 일 -연극 ‘랭귀지 아카이브’
[Column]소통 그 유한한 일 -연극 ‘랭귀지 아카이브’
  • 이혜인
  • 승인 2018.01.16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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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배운다. 매일 금 같은 돈과 시간을 바쳐가며 영어를 배우고 제2, 제3의 외국어까지 연마하는 데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소통은 현대사회에서 필수재를 넘어 권력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해서 혹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소통이 가능해질까. 우리는 종종 상대방과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어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극 ‘랭귀지 아카이브’는 언어와 소통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다.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언어와 소통에 얽힌 사연을 가지고 있다. 조지는 학문으로서의 언어, 언어의 존재의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어가는 언어들을 아카이빙한다. 그러나 정작 아내 마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허탈감 속에 마리와 헤어진다. 알타와 레스텐은 사어인 엘로웨이 어의 유일한 구사자로서 세상에 서로의 말을 이해할 사람이 둘 밖에 남지 않았지만 정작 서로 소통하는 데는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고 엘로웨이 어는 ‘아름다운’ 언어이기 때문에, ‘못된 것, 흉한 것을 말’하는 ‘화난 사람’의 언어, 영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연극의 또 다른 등장인물 엠마는 조지를 사랑하고 있고 그 마음을 조지에게 전하고 싶어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배우지만 정작 에스페란토로는 말하기를 주저한다.

 

언어는 함의로는 소통을 위한 사회 관습적 체계이지만 협의로는 한 사람의 세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가치체계가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만든다. 잘 알려진 말을 조금 비틀자면 “세상의 언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숫자와 동일하다” 극중 조지는 사라져 가는 말들을 아카이빙 하여 말이 담은 세계를 붙잡아 보려 하지만, 그 사라져 가는 말의 마지막 구사자인 알타는 이야기한다. 말이 죽고 세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죽고 난 다음 말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결국 인간의 존재가 말을 정의한다. 소통은 존재 사이에서 가능하다.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어도 다른 이의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혼자 떠드는 것과 타인과 소통하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다.

   

 

 

작가 줄리아 조는 이 연극을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인물들은 통할 수 없어서 많은 것을 잃는다.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기회, 사라져 가는 말을 붙잡을 기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기회 등 주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다. 상실은 유한성에서 온다. 삶이 유한하기에 언어도 유한하고 관계마저도 유한하다. 하지만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경험은 언어를 통해 기록이 되고, 그로 인해 상실했다는 사실까지도 후세에 남겨질 수 있다. 관객은 도리어 지금 당장 소중한 이와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인물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인생은 지금이 아니고서야 지금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남기는 일에 불과하다.

 

알타, 에스페란토 강사, 차장의 1인 3역으로 분한 백현주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말과 인물의 사(私)연에 천착해온 성기웅의 연출 또한 소극장 무대 위에 인물이 담긴 현실과 인물의 내면을 동시에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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