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바보의 길 …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바보의 길 …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 정희
  • 승인 2018.11.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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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열린문재단 이완택 이사장

격정, 열정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

()열린문재단 이완택 이사장을 만나본 느낌은 여느 목사님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젊어서 큰 사업을 해 본 탓일까?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고, 75세의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격정과 열정만 있다면 그는 아마 사람들을 돕는 재단 이사장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가 바로 재단의 이사장직을 수행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30살에 죽음의 고비에 다다랐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길로 목사의 길을 걸었다는 그는 수많은 고생을 하개척교회를 이끌고, 선교를 하는 것은 물론, 이제는 열린문재단 복지타운의 건립을 위해 힘쓰고 있다. 스스로를 거룩한 바보라고 부르는 이완택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사회의 한편에 여전히 남아있는 희망의 등대를 보는 듯 했다.

미혼모, 고아, 노인들을 위한 복지센터 구상 중

지난 98년에 창립된 열린문재단(, 광성재단· 이하 재단’)은 올해로 꼭 20년째를 맞이했다. 외교부(1998년 설립허가 제8)에 정식으로 등록되었으며, 기획재정부 지정기부금 등록재단인 이곳은 다양한 사업 분야를 망라한다. 의료사업(의료·보건학교 설립) 복지사업(고아원·양로원 사업) 농업개발(귀농귀촌·환경사업) 통일사업 각종 재난구호사업 교육사업(각종 학교 설립·운영) 예술문화교류사업을 비롯해 장학사업, 공정무역사업, 나눔여행사업, 미혼모 복지사업, 비전센터 등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돌보는 일과 함께 전 세계에 선교를 하는 것이다.

신학대학 졸업 후 광성교회를 세웠던 이완택 이사장은 현재는 재단 이사장과 아브라함축복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지난 1025일 재단의 사무실을 여의도로 확장 이전하면서 향후 새로운 사명에 대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30살에 예수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45년 동안 제 인생은 없어졌습니다. 오로지 주님이 하라는 대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을 돕고 선교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특히 공산권과 무슬림 국가를 상대로 선교했던 것도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아들에게는 참 못난 아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제가 살아왔던 인생을 거룩한 바보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 그리고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저 같은 바보 한 명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의 나이 75. 이제 그는 재단을 통해 새로운 선고 사업을 꿈꾸고 있다. 바로 미혼모, 노인, 가출 청소년, 자폐증 어린이, 다문화 자녀를 위한 열린문재단 복지타운이 그것이다. 3-5만 평 규모, 50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서울 여의도에서 1시간 거리의 지역에 복합 건물을 세울 계획이다. 이곳에는 미혼모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300(2인실), 독거노인들을 위한 양원 200베드, 300명의 유치원 교육 시설들이 건립된다. 여기에 조각공원, 추모공원, 산약초·채소밭, 사우나, 힐링 노래방들도 들어선다. 착공 및 토목공사는 대략 2020년 정도로 예정되어 있다. 취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과연 이 정도의 자본을 충당할 수는 있을까? 혹은 이완택 이사장이 과거에 큰 사업을 했다고 하니 혹시 재단을 위한 막대한 자금이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모든 예상은 빗나갔다.

선교하느라 저는 빚만 남았습니다. 제가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며 선교를 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주님께서 다 예비 해 놓을 것입니다. 부지는 기증으로 해결할 것이고, 건축비는 도자기를 국제 경매에 내놓아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은 항상 뭔가 일을 시킬 때 그 재원도 함께 주시기 때문에 돈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불쌍한 우리 이웃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쌍한 사람 이야기 들으면 발길 멈추고 도움 줘

오는 1213, 공군회관에서 사랑과 나눔으로 함께 한 20행사로 열린문재단 비전선포식 개최될 예정이다. 재단은 지난 20년간 수많은 활동을 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라면 UN군 상이용사 초청, 북한지원사업, 북경 축제 한국인공연단 파견, 잠비아 말라리아 퇴치사업, 중국 아리랑 장학회, 카자흐스탄 광성학교 개원, 캄보디아 도로공사, 중국 축제 공연단 파견, 제주 해맑음 다문화학교 개교 등이다. 지면에는 다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도와왔고 또 선교를 해왔다.

여러 선교 활동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것이 바로 공산권과 무슬림 국가들에서의 활동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국 선교를 위해서는 일반 민간 회사를 세워서 이를 통해 비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돈을 벌면 마약과 도박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인삼을 무척 좋아합니다. 먹으면 몸에 기력이 생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40년간 인삼을 했던 개성 출신의 교인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 인삼밭을 만들고 교회와 신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번창하게 되면 현지인에게 돌려주고 그 때 부터 스스로 하라고 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핑구, 단동 등 총 3곳에 선교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공산권의 경우 종교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선교를 한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전도를 하거나 사람들을 모으기는 힘들다. 그저 힘들고 못사는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스스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종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성매매를 위해서 전 세계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완택 이사장은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곳에 기술학교를 세워 200명의 학생을 모으고 교수, 관리직까지 뽑았다. 과목은 젊은 사람들이 취업을 잘 할 수 있는 과목을 위주로 했다. 요리, 미용 등을 주로 했으며 졸업식 날 1등과 2등은 한국으로 유학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첫 졸업식은 학생들과 엄마들의 통곡의 날이었다고 한다. 전체 학생의 96%가 취직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카자흐스탄으로 가서도 고아원을 만들고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도왔다. 이 소식을 들은 대통령 영부인이 직접 어린이용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고, 선교를 했다면 신앙심 깊은 모태 신앙은 아니었을까 하는 예상도 가능하다. 그런데 사실 그는 30살 까지만 해도 교회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업 잘하는 젊은 청년이었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사업을 시작해 돈이 발밑에 쌓일 정도로많은 돈을 벌었고 나중에는 30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해운업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을 정도로 막강한 자본을 구축했다. 그의 삶의 여정은 그저 선교사목사님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평범한 인생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마치 영화의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다.

 

해운업 시작 직전 죽을 병 걸려

저는 태어나서 아버지라는 말을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4개월 이후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잡일을 하며 잠을 자고 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에서는 다방에서 일을 하면서 또 숙식을 그곳에서 해결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힘든 고학을 하면서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것은 큰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정치를 선택한 것은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에 제가 일조를 했으면 했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저 스스로가 가난했기 때문에 돈을 버는 일이 급선무였죠.”

이렇게 해서 그의 사업이 시작됐다. 덕수궁이나 창경궁 등의 매점은 입찰을 통해서 사업권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1년 입찰금액을 써넣는 자리에서 이 이사장은 285천원을 써서 당첨이 됐다. 그런데 막상 장사를 해보니 하루에 파는 금액이 28만원이 넘었다는 것. 그때부터 그는 공원에 허니문 카를 만들고, 빵을 만들어서 전국의 극장과 유원지에 판매했다. 많은 돈을 벌다 보니 아예 부도 직전의 콜라 회사를 인수할 정도가 되기도 했다. 새로운 사업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해운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한 유명한 자본가를 찾아서 거액의 투자를 받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해운업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삶 전체를 뒤바꾸는 거대한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간경화로 인한 신장 합병증이었다.

병원에서는 우선 죽을 준비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했죠. 결국,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명의 저승사자가 와서 가자라고 하더군요. 저는 너무도 무서워서 병원을 뛰쳐나와 아무 곳에나 보이는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에 가보았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 총 4개월을 예수님에게 회개와 감사의 찬양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몸이 완전히 재생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나아지자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목사의 길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신학교의 시험을 보면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합격이 안 되면 목사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만의 잔머리였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본 신학교 관계자들이 이 이사장과 면담을 한 후, 그를 시험에 합격시켰다. 목사가 될 자질이 충분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공부를 마친 뒤 처음 세운 교회가 바로 신대방 삼거리에서 74년에 새운 광성교회였다. 열린문재단이 처음에는 광성재단이라는 이름이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고등학교의 고학에서부터 20대에 해운업을 꿈꿀 정도로 풍운아처럼 살아왔던 이완택 이사장. 또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가 목사와 선교사로 변신한 그 모든 모습은 어쩌면 우리 주변의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라는 하늘의 사명일 수도 모른다. 이제 75살의 나이에 또다시 열린문재단 복지타운에 건립에 도전하는 그의 도전과 용기에 누구든 박수와 격려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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