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반도 신경제지도' 새로운 비전 - 조병제 국립외교원장
[기고] '한반도 신경제지도' 새로운 비전 - 조병제 국립외교원장
  • 시사뉴스매거진
  • 승인 2018.09.2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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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
최근 일본을 다녀온 소감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일반화하기가 두렵지만, 이번에 만난 일본측 인사들의 다수는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정세 변화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주류 학계와 전문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보이고 있는 비판적 인식과 비슷했다. 희망적 관측과 근거 없는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은 국내에서 듣는 것과도 같았다.
 
일부 한반도 전문가들을 제외한 상당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할 수 있다고 한 데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군사훈련 중단이 한미동맹의 약화를 가져오고 이는 다시 미일동맹과 일본의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까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축으로 북한핵개발과 중국의 부상에 대응해 온 간단명료한 구도가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놀라울 정도로 컸다. 지난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체에 전쟁위기가 유래 없이 높았고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일본의 불안감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기의 진원에서 벗어나 있는 일본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원한다고 해서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에서 몇 가지 필자의 시각을 설명해 주었다.
 
- 첫째, 최근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과정은 북한의 핵개발과 전쟁 위기의 한가운데서 ‘전쟁만은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이 주도해 여기까지 오고 있지만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의 참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교류협력에 참여하고 세계적인 물류와 소통체계에 합류토록 하는 것이 목표라면, 한국과 미국은 물론, 중국, 일본, 나아가 ASEAN, EU 등 국제사회의 공통 과제이기도 하다.

- 둘째, 일본이 조속히 이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한국에게도 바람직하다.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일본의 참여는 의미가 있다. 일본이 북한과의 대화 재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을 평가하며 이 맥락에서 납치문제에 대한 창의적인 해법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셋째, 북미협상의 시작과 더불어 북중관계의 급속한 개선 동향이 두드러진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과의 중요한 협의를 앞두고 매번 중국을 방문하였다. 5월 7-8일 2차 방중에서 시진핑 주석은 ‘운명공동체’, ‘순치관계’로 북중관계를 표현하였다. 6.19-20일 3차 방중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한 식구’, ‘한 참모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넷째, 트럼프 현상이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상당기간 지속되는 상수가 될 수 있다. 트럼프 현상에 대한 미국 주류 언론과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부분 빗나갔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국 여론의 지지도는 45%에 달한다. 트럼프 취임 후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지지도가 완만하나마 상승세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판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 타당했던 논리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의 변화를 올바르게 보고 있는가?우리는 미국의 정치변혁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지난해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기억하고 있는가? 주변에서는 빠른 속도로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데, 우리 사고 체계는 여전히 20-30년 전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은 1990년대 초 동서냉전이 종식되던 때 이뤄졌어야 했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쳤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소중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가 보지 않은 길’이라는 이유로 두 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2015년 8월 16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라는 비전을 발표했다. 핵심은 환동해권과 환황해권의 양 날개 전략이었다. 환동해경제권은 부산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잇고, 나아가 부산항과 나진-선봉항, 일본의 니카타항을 삼각으로
연결하는 거대한 산업경제권이다.
 
환황해경제권은 여수와 목포에서 시작해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북한의 해주, 남포와 중국을 연결하는 산업경제권이다. 인천, 해주, 개성을 남북경제협력의 삼각지대로 잇고, 또 한 축으로 목포, 남포, 상해를 자유항으로 잇는 황해 트라이앵글 전략이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남과 북을 생산공동체, 소비공동체, 수출공동체로 만들어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기적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2017년 대선과정에서 환동해경제벨트와 환황해경제벨트 그리고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한 환경·관광벨트를 추가한 「H-프로젝트」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 6일 독일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에서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한 열차가 평양과 북경으로, 러시아와 유럽으로” 달려 나가는 구상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 구상은 4월 27일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의 하나로서 판문점 선언에 반영됐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판문점 선언에 나타난 것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다. 발표 당시부터 그것은 단순한 경제지도가 아니었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로 가는 평화지도였다. 북한 핵문제나 동북아 대립에서 위협받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절박함이 있었고, 평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장도 경제협력도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H-프로젝트」를 담은 USB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 그리고 평화체제 전환을 이루고 나서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의 모습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6월 12일 싱가폴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도 김정은 위원장에게 ‘평화와 번영이냐 아니면 고립과 암흑이냐’의 선택을 촉구하는 4분 가량의 비디오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역시 완전한 비핵화가 가져올 수 있는 북한의 미래상을 담은 것이었다. 문재인과 트럼프가 제시하는 북한의 미래상은 국제사회와 교류협력하고 세계와 소통하면서 번영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까지 북한에게 긍정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최고지도자와 만나 악수하고 새로운 관계 설정에 합의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미래와 「한반도 신경제지도」 실현의 전망을 밝게 해준다.
 
그러나 첩첩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넘어야 한다. 6월 27일 남북한의 철도관계자들이 만나 동해선과 경의선 철도 및 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사업을 본격화하려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해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핵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진전이 있어야 한다.
 
다시 「한반도 신경제지도」 를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한 때 유행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만을 보지는 않는다.
반드시 일정한 인식의 틀을 통해서 보게 된다. 요즘 용어로 프레이밍(framing)을 거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중 양자구도가 작동하고 있고, 한반도부터 인도양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국가들이 이 구도 속에서 운신의 폭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여기서 프레이밍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일대일로와 인도태평양 전략 사이에서 택일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운신의 폭이 보이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을 수 있는 프레이밍이 주어질 때 우리의 시야는 달라진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우리가 국익 중심의 관점에서 상황을 볼 수 있는 다른 프레이밍을 제공한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한반도와 동북아에 지속되어온 대결과 반목의 비정상을 공존과 화해의 정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과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전략적 환경이 바뀌고 있다. 하루 전의 연락만으로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70년 적대관계를 지속해 온 미국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제3국에서 악수를 나누고, 지나온 과거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기로 합의했다. 남북 간에 그리고 북미 간에, 행동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는 더욱 엷어 보인다.
한반도에서 이어져온 냉전구조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그로 인한 전쟁 위기의 절박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절박성의 끝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될 수 있도록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직시하고, 그에 걸맞게 가장 현실적인 대응을 해나가자는 것이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갈등구조를 협력구조로 바꾸어 나가려는 새로운 프레이밍으로 읽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실천적 지침이 그러하듯이 현실의 흐름을 읽고 반 발짝 앞서 나가는 것이 비전이다. 이전에 있던 길이 사라지고, 우리는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한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하지만, 그 길을 나서지 않을 선택의 자유도 없는 듯하다. 다시 4반세기가 지난 다음 세 번째 기회를 기다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우리를 떠민다. 사라진 길에 대한 미련보다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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